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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ukina Faso]내 친구, 내 언니, 내 엄마 안마리

    [Brukina Faso]내 친구, 내 언니, 내 엄마 안마리

    내 친구, 내 언니, 내 엄마 안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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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키나파소 사람들이 ‘밀’이라고 부르는 식물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같이 찧었다. 한국의 ‘조’와 비슷한 식물인데, 껍질을 벗겨서 밭에 심는다.나중에 현지 음식 ‘또’를 만드는 데 쓴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부르키나파소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50도를 넘나드는 기온 때문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더위와 사투를 벌이다 몸이 반쪽이 되어 돌아온다는 그 나라가 어떻게 내 마음에 깊숙이 자리잡았는지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부르키나파소가 무지 덥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해외봉사를 왔다. 비행기로 가나에 도착해서 사흘을 머문 후 버스를 타고 부르키나파소로 왔다. 부르키나파소는 여러 가지 색깔을 지닌 생동감 있는 가나에 비해 부드러운 황토 빛깔로 조용하고 서정적이었다. 그리고 많이 걱정했던 기후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덥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에 오기 전에 친구와 함께 한 찜질방 예행연습이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이곳의 기후에 잘 적응해 갔다.

     

    이곳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보면 ‘이곳은 아프리카니까’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바로 위생관념이다. 이곳 사람들은 설거지나 빨래를 할 때 세제나 비누를 엄청 많이 사용한다. 문제는, 제대로 씻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거지를 할 때 헹구는 물이 뿌옇게 흐려져도 갈지 않고, 빨래를 할 때는 한두 번 헹구면 끝난다. 비누칠을 하면 그것으로 깨끗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이 헹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흙바닥에서 더러운 물건을 입으로 가져가는데도 가만히 놔둔다. 그러나 샤워는 하루에 적어도 두세 번은 해야 한다. 이런 위생관념 말고는 큰 문화충격은 없다.

     

    이곳 생활에 적응해 갈 무렵,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함께 생활하며 이곳 문화를 가르쳐 주고 한국 문화도 배울 친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굿뉴스코 부르키나파소 본부에는 본부장님 가족 4명, 현지인 3명, 그리고 가나와 토고에서 온 대학생 2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현지인 3명과 대학생 2명은 모두 남학생이어서 그들과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되기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나가서 친구를 사귀자니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친구 없이 지내자니 너무 외로웠다. 그래서 내게도 현지인 룸메이트가 생기길 간절히 바랐다. 내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전달되었을까, 2월 말에 ‘안마리’라는 언니와 함께 1년 동안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 같은 언니, 안마리. 그녀의 첫인상은 조용하면서 왠지 어두웠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힘든 일이 있어서 우리와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여하튼 나에게는 그토록 바라던 룸메이트가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언니가 말수도 별로 없고 표정도 어두워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같이 생활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간단한 의사소통도 사전 없이는 하지 못했지만, 같이 방을 쓰고 같이 활동하면서 언니의 유쾌한 본능을 보았다. 한번씩 내게 던지는 말투나 행동에 나는 자지러지기 일쑤였다. 조용히 지내다가도 장난기가 발동하면 한동안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언니의 관심과 배려는 타지 생활을 하는 내게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의사소통도 자유롭지 못하면 오해가 생기지 않는가. 언니와 나 사이에도 많은 오해와 엇갈림이 있었다. 나는 자주 언니의 말투 때문에 토라졌다. 부탁조가 아닌 명령조의 말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언니라지만 나를 아이 다루듯 혼내거나 말할 때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나는 대화를 피하거나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언니는 ‘이 말을 할까 말까?’ 몇 번을 고민하다가 내게 하는 건데, 나는 그 마음을 보지 못하고 말투만 보니까 짜증이 났던 것이다. 그럴 때면 언니는 내가 화가 좀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다가와 주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빨리 하지 않을 때나 잘못된 행동을 할 때면 혼내기도 하고 다독이기도 하면서 날 이끌어 준 언니, 그렇게 언니는 내게 언니이자 엄마 같은 존재가 되었다.

    4월 말에는 언니와 함께 ‘코나’라는 시골 마을에 가서 2주간 지냈다. 사람들이 흙과 짚으로 만든 집에 살며 가축을 기르고 우물물을 길어 먹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 코나. 달과 수많은 별들이 전깃불 대신 우리를 비춰 주었고, 자연과 아기 돼지 3형제가 수세식 변기를 대신해 주었다. 그곳에서 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으로 가까워졌다. 언니는 소아마비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괄량이 삼총사의 리더로 마을을 누비며 일으켰던 재미난 사건들부터 ‘가에땅’이라는 7살 아들을 갖게 된, 하기 힘든 이야기까지. 코나에서 보낸 2주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마음을 나눈 값진 시간들이었다.

     

    특히 가에땅 이야기를 할 땐 생각이 많이 되었다. 우리는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피(내 이름), 난 이제야 세상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찾았어. 전엔 많은 돈을 벌어서 형편이 좋아지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어. 그리고 날 사랑한다는 남자가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을 줄 줄 알았어. 근데 아니었어. 내가 가에땅을 갖게 되었을 때 그는 나를 떠났어. 진정으로 날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행복해지기 위해 달려갔던 나의 결말은 미혼모였어. 나는 형편이 바뀌어야 행복한 줄 알았어. 근데 내가 깨닫게 된 게 뭔 줄 아니? 진정한 행복은 형편이 바뀌어야 되는 게 아니라 마음이 바뀌어야 된다는 거야. 형편만 생각하면 난 비참한 여자야. 하지만 내 마음이 바뀌니까 그렇지 않아. 세상에 자기가 낳은 자식과 함께 살지 못하는 불행한 엄마가 얼마나 많니. 자식이 병을 지녀 고통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고. 나는 건강하고 밝은 내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행복한 엄마잖아. 안 그래?”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지난 삶을 돌아보았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부족함 없이 살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했던 나날들, 남을 배려하거나 그 마음을 살피지 못하고 나를 앞세웠던 삶, 나는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었다. 내게는 감사할 조건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프면 바로 달려갈 수 있는 병원이 있고,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 주시는 부모님이 계시고, 하루 세끼 굶지 않고 오히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아프리카에서 나는 내가 너무나도 많은 걸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언니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때로는 친구처럼 웃고 장난치고, 때로는 언니로서 나를 이끌어주는 안마리 언니. 한국으로 돌아가서 부르키나파소를 생각하면 내 친구이자 룸메이트인 안마리 언니가 그냥 떠오를 것 같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부르키나파소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50도를 넘나드는 기온 때문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더위와 사투를 벌이다 몸이 반쪽이 되어 돌아온다는 그 나라가 어떻게 내 마음에 깊숙이 자리잡았는지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부르키나파소가 무지 덥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해외봉사를 왔다. 비행기로 가나에 도착해서 사흘을 머문 후 버스를 타고 부르키나파소로 왔다. 부르키나파소는 여러 가지 색깔을 지닌 생동감 있는 가나에 비해 부드러운 황토 빛깔로 조용하고 서정적이었다. 그리고 많이 걱정했던 기후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덥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에 오기 전에 친구와 함께 한 찜질방 예행연습이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이곳의 기후에 잘 적응해 갔다.

     

    이곳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보면 ‘이곳은 아프리카니까’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바로 위생관념이다. 이곳 사람들은 설거지나 빨래를 할 때 세제나 비누를 엄청 많이 사용한다. 문제는, 제대로 씻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거지를 할 때 헹구는 물이 뿌옇게 흐려져도 갈지 않고, 빨래를 할 때는 한두 번 헹구면 끝난다. 비누칠을 하면 그것으로 깨끗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이 헹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흙바닥에서 더러운 물건을 입으로 가져가는데도 가만히 놔둔다. 그러나 샤워는 하루에 적어도 두세 번은 해야 한다. 이런 위생관념 말고는 큰 문화충격은 없다.

     

    이곳 생활에 적응해 갈 무렵,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함께 생활하며 이곳 문화를 가르쳐 주고 한국 문화도 배울 친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굿뉴스코 부르키나파소 본부에는 본부장님 가족 4명, 현지인 3명, 그리고 가나와 토고에서 온 대학생 2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현지인 3명과 대학생 2명은 모두 남학생이어서 그들과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되기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나가서 친구를 사귀자니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친구 없이 지내자니 너무 외로웠다. 그래서 내게도 현지인 룸메이트가 생기길 간절히 바랐다. 내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전달되었을까, 2월 말에 ‘안마리’라는 언니와 함께 1년 동안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 같은 언니, 안마리. 그녀의 첫인상은 조용하면서 왠지 어두웠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힘든 일이 있어서 우리와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여하튼 나에게는 그토록 바라던 룸메이트가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언니가 말수도 별로 없고 표정도 어두워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같이 생활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간단한 의사소통도 사전 없이는 하지 못했지만, 같이 방을 쓰고 같이 활동하면서 언니의 유쾌한 본능을 보았다. 한번씩 내게 던지는 말투나 행동에 나는 자지러지기 일쑤였다. 조용히 지내다가도 장난기가 발동하면 한동안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언니의 관심과 배려는 타지 생활을 하는 내게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의사소통도 자유롭지 못하면 오해가 생기지 않는가. 언니와 나 사이에도 많은 오해와 엇갈림이 있었다. 나는 자주 언니의 말투 때문에 토라졌다. 부탁조가 아닌 명령조의 말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언니라지만 나를 아이 다루듯 혼내거나 말할 때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나는 대화를 피하거나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언니는 ‘이 말을 할까 말까?’ 몇 번을 고민하다가 내게 하는 건데, 나는 그 마음을 보지 못하고 말투만 보니까 짜증이 났던 것이다. 그럴 때면 언니는 내가 화가 좀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다가와 주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빨리 하지 않을 때나 잘못된 행동을 할 때면 혼내기도 하고 다독이기도 하면서 날 이끌어 준 언니, 그렇게 언니는 내게 언니이자 엄마 같은 존재가 되었다.

     4월 말에는 언니와 함께 ‘코나’라는 시골 마을에 가서 2주간 지냈다. 사람들이 흙과 짚으로 만든 집에 살며 가축을 기르고 우물물을 길어 먹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 코나. 달과 수많은 별들이 전깃불 대신 우리를 비춰 주었고, 자연과 아기 돼지 3형제가 수세식 변기를 대신해 주었다. 그곳에서 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으로 가까워졌다. 언니는 소아마비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괄량이 삼총사의 리더로 마을을 누비며 일으켰던 재미난 사건들부터 ‘가에땅’이라는 7살 아들을 갖게 된, 하기 힘든 이야기까지. 코나에서 보낸 2주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마음을 나눈 값진 시간들이었다.

     특히 가에땅 이야기를 할 땐 생각이 많이 되었다. 우리는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피(내 이름), 난 이제야 세상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찾았어. 전엔 많은 돈을 벌어서 형편이 좋아지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어. 그리고 날 사랑한다는 남자가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을 줄 줄 알았어. 근데 아니었어. 내가 가에땅을 갖게 되었을 때 그는 나를 떠났어. 진정으로 날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행복해지기 위해 달려갔던 나의 결말은 미혼모였어. 나는 형편이 바뀌어야 행복한 줄 알았어. 근데 내가 깨닫게 된 게 뭔 줄 아니? 진정한 행복은 형편이 바뀌어야 되는 게 아니라 마음이 바뀌어야 된다는 거야. 형편만 생각하면 난 비참한 여자야. 하지만 내 마음이 바뀌니까 그렇지 않아. 세상에 자기가 낳은 자식과 함께 살지 못하는 불행한 엄마가 얼마나 많니. 자식이 병을 지녀 고통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고. 나는 건강하고 밝은 내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행복한 엄마잖아.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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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지난 삶을 돌아보았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부족함 없이 살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했던 나날들, 남을 배려하거나 그 마음을 살피지 못하고 나를 앞세웠던 삶, 나는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었다. 내게는 감사할 조건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프면 바로 달려갈 수 있는 병원이 있고,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 주시는 부모님이 계시고, 하루 세끼 굶지 않고 오히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아프리카에서 나는 내가 너무나도 많은 걸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언니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때로는 친구처럼 웃고 장난치고, 때로는 언니로서 나를 이끌어주는 안마리 언니. 한국으로 돌아가서 부르키나파소를 생각하면 내 친구이자 룸메이트인 안마리 언니가 그냥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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